여행을 다시 배우다, 『Atlas Obscura』

이미지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세계지도를 바라보던 초등학생 시절을 떠올렸다. 그 종이 위에는 아직 도달해보지 못한 세상이 무수히 떠 있었고, 손가락으로 그 위를 더듬으며 이름도 낯선 도시를 읽어보곤 했다. 『Atlas Obscura』는 그런 어린 시절의 경외심을 다시 불러오는 책이다. 너무나도 밀도 있고, 놀라운 이야기들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마다 담겨 있다. "여행은 익숙함을 지우는 연습이다." 아틀라스가 아닌, 경이의 수집함 책을 펼치자 마자 시선에 들어온 것은 투르크메니스탄의 사막 한가운데. 현지에서는 '지옥의 문'이라 불리는 그 장소다, 40년 넘게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는 천연 가스 구덩이로, 마치 지구의 숨구멍처럼 어둠 속에서 울컥울컥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준다. 다큐멘터리에서 지나치듯 무심코 본 적이 있었지만, 책에서 그 장면을 다시 보게되니, 더 없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장작처럼 피어오르는 불길과 모래 위로 진동하는 열기의 묘사는 단어 하나하나에서 살아 움직이듯 보이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손끝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저자들은 이 책을 '호기심의 캐비닛'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표현이 왜 절묘하게 맞는지, 이 장면에서 깨닫게 되었다. 장소 하나하나가 냉장 보관된 백과사전 속 정보가 아니라, 세상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던 기억의 파편처럼 생생하게 펼쳐진다. 익숙하지 않음이 주는 자유 책은 무심코 지나쳤던 세상의 이면을 끄집어낸다. 뉴질랜드의 반딧불이 동굴이나, 그 어둠 속을 빛으로 수놓은 자연의 장면 앞에서 푹 빠져 버렸다. 인도의 계단식 우물은 건축적 아름다움과 수학적 질서가 어우러진 조형물로서 눈을 사로잡았고, 영국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거머리로 작동하는 날씨 예보 장치는 믿기 어려울 만큼 독특하고도 기묘하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현실과 환상이 얇은 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을 보고있으면 지금 당장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서고 싶게 만든다. 계획보다는 ...

제네바에서 키베르까지, 부비에의 여행

이미지
살면서 단 한 권의 책이, 삶의 방향을 흔들어놓는 일이 있다. 니콜라 부비에의 『The Way of the World(세상의 용법)』은 내게 그러한 충격을 안겨준 책이다. 책에서는 여행의 노하우는 담겨있지 않다. 오히려 모든 익숙한 기준을 내려놓고, 세상을 보고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행은 사람을 만들거나 해체시킨다" 는 부비에의 고백처럼, 책장을 덮었을 때 나는 마치 해체된 퍼즐 조각이 새로운 질서를 찾아 맞춰지는 감각을 느끼게 될 것이다. 피아트 토폴리노, 고장이라는 축복 여행에서 동행이란 단어는 사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세상의 용법』에서 부비에와 그의 친구이자 화가인 티에리 베르네의 여정에 함께한 피아트 토폴리노는 단순한 탈것을 넘어서는 존재였다. 그 낡은 자동차는 말없이 이들의 길을 함께 걸었고, 고장이라는 이름의 우연한 정지에서 수많은 인연과 마주침을 가능케 했다. 작은 엔진의 떨림과 오일 냄새, 균열 난 차체 아래에 누워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선하게 그려진다.  "황폐한 정비소야말로 형이상학적 만남의 장소였다" 부비에의 묘사는 과장이 아니라 실감이다. 한겨울 차가운 바람이 스며드는 정비소 안에서도, 인간의 체온과 이야기는 여전히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 장소에서 만난 누군가의 짧은 미소, 도와주려는 손길, 커피 한 잔의 온기야말로 여행 중 만나는 진짜 사람 냄새였다. 토폴리노는 자주 멈췄고, 그 멈춤이야말로 두 사람이 '세상'을 만나고 해석하는 방식이었다. 타브리즈에서 배운 느림의 미학 이란 북부 타브리즈에서 부비에와 베르네가 보낸 겨울은, 내게도 오래도록 머무는 장면이 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여행을 잠시 멈추고, 낯선 도시의 리듬에 몸을 맡겼다. 빠르게 회전하는 문명의 기어에서 잠시 벗어나, 이들은 시간의 속도를 늦추는 법을 배워간다. 오늘날처럼 효율과 속도를 중시하는 시대에, 그런 '정지'는 오히려 불편하고 두려운 일일 수 있다. 하지...

가보지 않았기에 선명한 베니스, 『Venice Observed』

이미지
베니스에는 가본 적이 없다. 메리 맥카시의 베니스 관찰기』를 접하게 되고, 한 계절쯤 그 도시에서 살아본 듯한 기이한 감각에 휩싸였다. 어떤 장소는 직접 가보지 않아도, 좋은 문장을 따라 상상 속에서 충분히 살아볼 수 있다. 바로 이 책은 그런 마법을 보여준다. 낭만과 고전 사이, 베니스라는 역설 내게 베니스는 늘 엽서 속 이미지였다. 푸른 운하와 반짝이는 곤돌라, 그리고 산 마르코 광장에 내려앉은 흰 비둘기 떼. 저자는 이런 인상들을 첫 장부터 정면에서 깨뜨려 버린다. 그녀는 베니스에 대해 쓰는 일은 이미 늦었다고 말하는데, 모든 사람이 베니스에 대해 같은 말을 반복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복조차도 베니스의 본질이라는 역설이 이 책의 시작이 된다. “베니스는 누구에게나 같은 감정을 주는 도시다. 그 감정은 진부하지만, 동시에 진실하다.” 이 문장을 읽으며, 스마트폰에 담긴 여행 사진들을 손가락으로 휙휙 넘기던 행동이 실은 표면만 훑고 지나간 기록에 가까웠다는 걸 깨달았다. 사진은 빛나는 순간만을 포착하지만, 맥카시의 문장에서는 그 도시가 살아온 시간의 흔적과 그 속에 켜켜이 쌓인 감정과 사유의 깊이를 천천히 들여다보게 만들고 있다. 베니스는 인스타그램 속에서 한 장의 낭만으로 소비되기보다는, 단어와 문장의 결을 따라가며 느껴야 할 도시였던 것이다. 창문 하나가 만든 관찰자의 거리감 저자는 베니스의 거리를 걷는 것 보다, 창문을 통해 도시를 바라보는 길을 택하고 있다. 그녀가 머물던 팔라초의 창가에서 베니스를 일상처럼 소비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일정한 거리에서 사유하는 관찰자의 시점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직접 뛰어드는 대신 한 발 물러나 도시의 흐름을 바라보는 방식이 책의 전체적인 태도를 결정짓고 있다. 그래서 『베니스 관찰기』는 현장감 넘치기 보다, 도시에 대한 명상을 산문으로 풀어내는 것으로 읽힌다. 그녀는 운하의 표면에서 빛나는 윤슬의 아름다움에 더해, 그 아래에 흐르고 가라앉은 시간의 흔적과 인간의 흔들림에 더 주목하고 있다. “시...

호텔은 여행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이미지
도시를 거닐다 보면, 한적한 거리에서 번쩍이는 호텔 간판을 마주칠 때가 있다. 그 순간 나는 종종 상상한다. 저 안에선 어떤 시간이 흐르고 있을까. 벽 너머의 사람들은 어떤 감정으로 하루를 마무리할까. 김다영 작가의 『나는 호텔을 여행한다』를 펼쳤을 때,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하는 한 권의 여행을 만나게 된다. 익숙하게만 여겨졌던 호텔이라는 공간이, 이제는 낯설고도 매혹적인 여행의 주인공으로 다가왔다. 호텔을 고르면, 여행의 중심이 달라진다 기존의 여행 계획은 대부분 이렇게 흘러간다. 도착지와 보고 싶은 장소를 먼저 정하고, 마지막에 '괜찮은 숙소'를 고른다. 그러나 『나는 호텔을 여행한다』는 그 순서를 정면으로 뒤집는다. 이 책에서는 “호텔을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동의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 몇 년 전, 베트남에서 우연히 예약하고 머물렀던 한 호이안의 고즈넉한 인테리어의 호텔에서 여행의 일정에서 숙소에서 머무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 화창한 날이었지만, 바깥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아도,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고, 바깥 풍경이 은은히 흐르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보낸 그 하루는 그 어떤 관광보다 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호텔은 단순히 잠만 자는 공간이 아니라, 하루를 살아내는 장소”라고. 저자가 얘기한다. 이 문장 하나에 이 책의 모든 의미가 압축돼 있다. 여행의 키워드는 이제 ‘능동적 휴식’ 무작정 쉬기 위한 여행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쉬는 여행’. 이 책은 그 개념을 다양한 호텔을 통해 실현시키고 있다. 여행은 의무가 아닌 휴식과 새로움을 얻고자 하는 여정이다. 보통 여행을 하면서도 일정표에 묶이고, 구글맵에 의지하며 헤메다 그 시간마저 일처럼 보낸다. 책에서는 그런 여행의 틀을 부드럽게 흔든다. “어메니티 하나, 침대 옆 조도, 로비의 음악”이 곧 나를 움직이게 한다고.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건, 하와이 라나이 섬의 포시즌스 호텔을 소개한 대목이다. '스트레스를 섬에 ...

『도쿄 산책자』 정체성을 잃은 시대, 도시에서 나를 찾다

이미지
도쿄는 내게 늘 이중적인 인상을 주는 도시였다.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화려하면서도 공허한 그 도시. 그러던 어느 날, 강상중 교수의 『도쿄 산책자』를 접하면서 나는 마치 안개 속 풍경이 선명해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도시의 골목마다, 거리의 표정마다 녹아 있는 인간과 사회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풀어내고 있었다. 그 안에서 나는, 내가 잊고 있었던 여행의 진짜 의미를 되짚어보게 되었다. 이방인으로 도쿄를 걷다 책장을 펼치자마자 마주한 문장이 있다. “도쿄를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합니다. 상경한 지 40년이 넘었지만 이 거리에서는 언제까지고 스트레인저, 그런 기분입니다.” 이 말은 나의 여행 경험을 통째로 대변하는 듯했다.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는 순간,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고 믿는 나에게 이 말은 묘한 위로가 되었다. 강상중 교수는 도쿄를 그저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도시와 부딪히며, 이방인으로서의 시선으로 도쿄의 속살을 들여다 보고 있다. 나는 그가 바라보는 풍경을 함께 따라 걸으며, 내가 지나쳐온 장소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장소가 말을 걸어오는 순간들 『도쿄 산책자』는 장소마다 고유한 질문을 던진다. 메이지신궁에서 “마음의 성역”이라는 주제로, 현대인이 신성함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해 묻는다. 내가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느꼈던 청명한 공기와 경건한 분위기는 단지 경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책을 통해 그 감각 뒤에 깃든 수백 년의 시간과 사람들의 기도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포시즌스 호텔이나 국립신미술관, 도쿄증권거래소 같은 공간에서도 저자는 일반적인 정보 보다는 사유를 끌어내고 있다. 도시가 소비와 생산의 장소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서사가 사라진 시대의 도시 롯폰기힐스를 가리켜 ‘도시의 바벨탑’이라 표현한다. 초고층 빌딩과 복합 문화 공간이 모여 있는 이곳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얼굴을 비추어 본다. “대서사의 종언”이라는 개념을 꺼내 들며, 도시의 가치는 더 이상 단일한 서사로 설명되...

길 위의 진짜 안내자, Bradt Travel Guides를 펼치며

이미지
노선을 따라가는 여행에는 익숙함이 있다. 어디를 가도 이미 누군가의 발자국이 나 있다. 그렇게 우리는 ‘검증된 코스’에 의지한다. 하지만 여행은 때로 길을 잃는 데서 시작된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Bradt Travel Guides 같은 존재가 있다. 마치 거친 사막 한가운데서 나침반을 꺼내 드는 듯한 감각. 이 시리즈는 한 번도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지역, 갈등과 상처의 그림자가 짙은 공간, 혹은 누구의 리스트에도 오르지 않은 마을들을 품는다. '처음'의 순간을 기록한 가이드북 Bradt의 가이드북을 처음 접한 건, 아프리카 여행에 관심을 가지면서다. 타 여행 출판사들이 스쳐 지나간 모잠비크에 대해, Bradt는 전쟁 이후의 변화된 풍경과 복잡한 역사, 현지인들의 목소리를 꼼꼼히 담아냈다. 일종의 ‘현지의 기억 저장소’ 같다고나 할까. 흥미로운 점은 Bradt가 실제로 그 지역에 대한 ‘최초의’ 영어 가이드북을 썼다는 점이다. 마다가스카르, 우간다,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보스니아까지. 여행 출판사라기보다는 지리적·문화적 기록자라는 인상까지 준다. 누군가에겐 너무 이르거나 위험할 수 있는 순간을, Bradt는 오히려 그 ‘초입의 공기’로 포착한다. 이건 단순히 빠르다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이목이 닿기 전, 그 땅의 이야기를 끄집어낸다는 건, 사려 깊음과 열정을 전제로 한 일이다. Bradt만의 시선, 그리고 저자들의 깊이 Bradt의 또 다른 독특함은 ‘누가’ 쓰느냐에 있다. 수많은 가이드북들이 편집자 중심의 템플릿 기반으로 작성되지만, Bradt는 철저히 저자 중심이다. 보스니아 가이드북은 실제로 그 땅에서 20년 이상 살아온 전문가가 썼다고 한다. 그의 문장은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마치 조용한 대화처럼 다가왔다. 특히 흥미로웠던 건, 의료 챕터를 의사와 협업해 작성한다는 점. 세계 곳곳을 여행한 의사 Jane Wilson-Howarth가 참여한 건강 정보는 신뢰감을 넘어, 독자에 대한 진심어린 배려로 느껴졌다. 단순히 어디를 조심하라는 문...

우리는 숲으로 여행 간다, 삶을 자연의 리듬에 맞추는 연습

이미지
사람들은 왜 숲으로 가는가? 도심의 소음에서 멀어지고 싶은 단순한 회피일까, 아니면 어떤 본능적인 회귀일까. 《우리는 숲으로 여행 간다》 는 자연이라는 오래된 친구를 다시 찾아가는 길잡이이며, 동시에 사람들의 일상에 치유의 틈을 만들어주는 감성적인 지도와 같은 책이다. 책을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저자 부부의 묵직한 경험이다. 안윤정과 서은석, 이들은 15년 넘는 시간을 전국의 자연휴양림과 치유의 숲에서 보냈다. 단순한 방문이 아닌, '정주'에 가까운 여행을 반복하며 그 속에서 살아 있는 이야기를 길어 올렸다. 그들의 언어는 화려하지 않지만 진정성으로 빛난다. “숲의 소리는 우리의 생각을 잠재우고, 느린 호흡을 선물한다” 는 책 속 문장은, 독자 스스로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게 한다. 느린 여행을 위한 정확한 길잡이 책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독자를 위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초보자를 위한 예약 플랫폼 비교, 캠핑 준비물 체크리스트, 계절별 추천 장소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특히 국립공원과 지자체 산림시설 간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여, 독자가 자신의 목적에 맞는 여행지를 쉽게 고를 수 있도록 돕는다. 이 모든 정보가 단순한 수집이 아닌, 실제 체류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신뢰가 간다. 여행 중에 웹에서 본 정보는 현실과 너무 달라 실망이 컸던 적이 있다. 그 뒤로는 반신반의 하며 정보를 보는 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실제 저자가 예약하고 체류한 후 작성한 평가를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어 허위 기대를 줄이고 있다. 일반적 정보에 체험이 핵심이라는 점에서, 더 유용한 가이드였다. 테마로 묶은 숲의 이야기들 책은 단순히 장소를 나열하지 않는다. ‘힐링이 되는 숲’, ‘아이와 함께 가기 좋은 숲’, ‘바다가 보이는 숲’, ‘전망이 좋은 산림’, ‘캠핑에 특화된 야영지’ 등 테마별로 정리되어 있다. 각각의 테마 속에서도 장소마다 다른 특징과 분위기를 꼼꼼하게 분석하고 있다. 봉화의 비슬산자연휴양림은 피톤치드의 농도 데이터와 함께 산림...